터키여행기

돌마바흐체궁전 터키여행기22부

이모르 2021. 3. 21. 06:49

 

서기 570년경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서 한 사람이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마호메드였다. 후일에 그는 마침내 세계 역사를 바꾸어 놓은 인물이 되었다. 이슬람교가 출발한 아라비아 땅은 그 옛날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 태어난 이스마엘 자손들이 살아온 땅이었다. 그들이 믿고 있는 전설은 하갈과 이스마엘이 사라의 핍박을 피하여 아브라함의 집을 나온 후에 목이 말라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우묵한 것을 터치시니 거기서 물이 나와서 마시고 소생했다는 성경의 이야기를 따라 한 우물 곁에다 신의 집이라는 집을 지었다고 전한다. 오늘날 그 곳에는 카바신전이라는 신전이 세워져 있고 해마다 수백만의 순례자들이 찾는 곳으로 이슬람교의 최대 성지라 불려진다. 이스람은 유대교 기독교 를 혼합한 교리라 하는데 무함마드의 외침은 한손에 칼을한손엔 코란을역설 그만큼 호전적이 라 여겨졌었 지만

 

 

 

다마스커스에 있는 살라딘동상 사진출처 다음 문화생활 한계레

 

살라딘으로 알려진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1138-1193) 는 십자군 전쟁당시에루살렘에서 완강히 저항하는 기독교 연합군의 항복을 받아 성스러운 에루살렘을 탈환한다 그후 그는 1차 십자군 전쟁당시 에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들이 유대인과 아랍인을 잔인하게 죽였던것 과는 달리 성내에 거주하는 기독교인들의 목숨을 살려주고 재산까지 보존하여준다

 

12세기 분열위기서 아이유브왕조 건

3차 원정온 십자군 2만명 전멸시키고
적장 사자왕 리처드 두 번이나 구해
동서양 모두가 추앙하는 평화주의자

 

1193년3월4일 영국의 리처드왕과 평화조약을 체결한지 몇달만에 그가 죽자 금고가 개방되었는데 장례비용조차도 부족할 정도여서 모두가 놀라워 하였다 지금도 끝나지 않는 중동의 치열한 싸움에서 어느누가 더 잔인한가??성지 에루살렘의 통곡의 벽은 알고 있을것이다 1453년 터키에 오스만 제국이 생성되고 여기 돌마 바흐체 궁전에서 1922년 술탄의 폐지로오스만 제국은 끝이 난다.....

 

 




 

 

보스포로스 해협을 항해(ㅎ 관광)하기위하여 유람선에 승선한다

 

 

 

 

여행 첫날의 감동은 좌우 유럽과 아시아의 정점이 교차되어 수많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건재한 유적들이 스치고 지나는데 갈매기 때도 같이 비상하며 우리를 반겨준다

 

 

 

 

 

 

 

 

 

첫번 보이는것 가이드의 설명은 돌마 바흐체 궁전이다 술탄 압듈메지드 시대인 1843년 -1856년 사이 건축가 가라베트 발얀이 건축한 궁전이다정원을 포함해 110.000평방미터 면적인 이궁전은 접견실과 연회실 하렘등 세개의 구역으로 되어있다다른 술탄의 궁전들과는 다르게 궁전의 알현실과 하렘이 같은 건물에 있다가장중요한 구역은 연회실(행사장)로 이홀은 4.5톤 무게의 대형 상드리에로 유명하다돌마흐체 궁전의 장식품과 인테리어는 19세기 유럽에서 유행하던 바로크 로코코 예술양식으로 되어있다

 

1922년 터키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케말 파샤(아타 투르크)"가 오스만 투르크 왕조를
무너뜨리고 공화국 수립이후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의 문자 개혁 작업이 이곳에서
진행되었으며 1927년-1937년 사이에 행해진 터키어 회합과 1937년 2차 터키역사 회의도 이곳에서 열렸다

 

아타투루크 19381110일에 터키국부인 그는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아직도 그가 서거한 집무실의 시계는그의 사망 시간 95분에 맞추어져 있다.한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터키는 계속 유럽연합에 가입하려고 1.2.3차 노력을 하고 있지만 유럽쪽에선 인권문제를 들고 나와 가입을 시키지 않고 있다한다  케말에게는 숙원이 하나 있었다. 터키의 유럽 편입이다. 케말의 터키는 이슬람의 자존심까지 저버리며 유럽을 짝사랑해 왔다. 그러나 유럽의 기독교 클럽은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터키의 입회를 회피하고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 정문

 

 

 

 

 

 

 

 

 

 

 

 

 

 

 

 

 

4.5톤의 상제리아

 

 

 

 

 

 

 

 

 

돌마 바흐체 궁전(DolmaBah?e Sarayı)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 감동을 받은

술탄 압둘메지드 1(Sultan Abdulmehcit I)의 명에 의해서 지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 은 보스포러스 해협의 유럽측 해안을 따라,

해협정면에 세워진 전장 600미터의 궁전이다.

 

돌마흐체와 토카프 궁전의 화려함에 반하여 가이드에게 들은 오스만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인생이야기를 해본다 물론 나라마다 마지막 황태자 들은. 거의 비참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청의 푸이 한 인간의 삶을 비춰봤을 때, 황제라는 신과 견줄만한 위치에서 온갖 시중과  호와 부족함 없는 삶을 살다가 근대화와 군국주의에 맞물린 시대에 흘러들어가면서 조롱과 모욕을 받으며 결국 보잘 것 없는 초라한 삶으로 마감하게 되버린 한 사람의 지극히 흥망성쇠의 인생경로.. 결국 일본군에의한 괴뢰 만주국 황제가 되어 온갖 오욕을  쓴채 사라져 간 푸이 !!!!!

 

6.10만세 운동을 유발시킨 우리의 마지막 황자 순종 1910년 이완용 송병준의

주도로 한일 합방 대한제국은 멸망합니다 황제에서 왕으로 강등되고 일인들에게

이왕으로 불리면서 창덕궁에 머물다가 1926년

4월25일 생을 마감하는데 국장일 6.10일 만세운동이 일어난다..터키여행 중에 꼭 듣게되는

오스만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마호메트 오르한'의 파란 만장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우리의 마지막 순종이 생각이 났다...

 

 

오스만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인생이야기

 

1923년 3월 3일자로 터키 공화국이 출범한 후 오스만 왕가에는 커다란 파문이 몰려오게 되는데, 

모든 왕족들 144명에게 추방령이 내리게 된 것입니다.

 

15세의 어린 왕자 '마호메트 오르한'은 그날 오후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심상치 않은 공기를 느끼게 됩니다.


2명의 경찰과 경시 총감이 눈물을 글썽이며 종이 한 장을 건네 주면서

“저를 용서하십시오. 왕자님, 싸인을 부탁 드립니다.”

이제 막 학교에서 돌아와 자전거를 타려던 어린 왕자는 종이에 적힌 내용을 채 읽지도

못하고 싸인을 합니다.

 

24시간 안으로 떠나라는 이 명령서는 왕족들에게 어떠한 이유도 용납되지 않았고,

그리고 재산은 단 한 푼도 가져 갈 수 없다는 단서가 붙은

채 3월5일 이들은 기차와 배에 실려 이날 밤 안으로 국경을 넘어야 했습니다.

 

술탄 무라트 5세의 딸이 홍역을 앓고 있어서 20일간의 출발이 연장된 한가지 외에는.
이로부터 68년 동안 고국 땅을 밟지 못하는 긴 여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 오스만 제국의 왕자로서 이미 서있을 땅이 없었습니다.

 

망명생활을 하는 왕족들의 집을 이곳 저곳 신세 지다가 드디어 17세가 되자

그는 어느 누구도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새로운 나라로 가기로 결심하고

주머니에 단돈 8프랑을 넣고 브라질로 갔습니다.


주석 공장직공, 선박의 화물 나르는 인부, 커피를 포장하는 포장공 등

닥치는 대로

그는 고난 찬 세월을 보내다가 이집트로 오게 되는데

이집트의 왕자들이 그를 알아보고 자동차 한대 살 돈을 꾸어주게 됩니다.

 

그는 이 자동차로 장거리 택시기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신문에 <오스만 왕자 택시 기사되다>라는

기사를 보고 자동차를 팔아버리고 말았습니다.


1960년도에 들어와서는 자동차 배달부가 되는데 각국에서 오는 소비자의

새로 구입한 자동차를 배달하는 일입니다. 그의 침실은 항상 자동차 뒷좌석이었습니다.


터키에 와서 수많은 보화와 황금요람과 아름다운 가구들로

가득 찬 궁전을 보신 분은 감회가 있으실 것입니다.
아무튼 많은 세월을 자동차 운전대와 씨름하며 보낸 후 57세가 되던 해

파리에 있는 <미국전쟁기념회>에 자리를 얻게 되는데 미군용사의

묘지를 안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덕에 1974년까지 매달 190$의 연금을 탈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말하기를

“나는 여러 직업을 가졌던 것에 대해 꽤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소.

어떤 일이든 나는 해 내었소. 나는 그 동안 땀으로 번 돈으로 살았고,

내 주머니에 부당한 돈이 들어간 적이 없었소.

동정이나 팁조차 안 받았고 누구에게도 빚이 없소.

나는 오스만 제국의 명예를 더럽힌 일이 없소.

그리고 나의 자식들에게 제국의 마지막 왕손이라는 말을 물려주기 싫어 결혼도 하지 않았소.”
그 당시 터키 땅을 떠난 남자왕족은 50년, 여자는 28년 안으로
귀국을 할 수 없게 법을 제정하였고,

터키 국민으로서의 자격마저 잃게 했습니다.

 

50년이 지나자'마호메트 오르한'은 타국에서 유랑하면서도 끊임 없이

귀국 탄원서를 터키 정부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이 탄원을 계속 외면했습니다.


1992년 Turgut Ozal 대통령이 드디어 그의 방문을 허용하여 이제 꿈에도

그리던 이스탄불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살아서 조국을 밟고자 했던 그의 꿈이 이루어 지게 된 것입니다.


“왕족 중에서 가장 장수하시는 편인데 무슨 비결이라도 있으셨는지?”

라고 한 기자가 묻자

“나는 조국을 보기 전에는 죽을 수가 없다는 일념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은 어떻게 소일하고 계셨습니까?”

“아침마다 공항 라운지로 나가서 터키커피를 마시며 조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는 게 내 일과입니다.

 

나도 저렇게 마음대로 오갈 수가 있을까?

했는데 이렇게 죽기 전에 보스포러스를 볼 수 있게 해준 정부에 감사 드립니다.”


다정 다감한 국민들은 <이제 그가 연로했으므로 그의 여생을 터키에서 마감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정부에 빗발치듯 청원했습니다.

그러나 왕자는 “아니오. 나는 내 조국에 한번도 세금을 낸 일이 없소.

염치도 없이 어찌 나의 여생을 부탁할 수가 있겠소.”

국민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연발하고 5박6일 일정의 방문을 마치고

망명지 Nice로 떠났습니다.


조국에 체류하는 동안 눈시울이 한번도 마를 새가 없었던 83세의 이 왕자님.

자, 그 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로부터 꼭 1년 뒤 입니다.

터키 일간지 신문이 일제히 그의 사망 소식을 보도했습니다.

그가 자기 숙소 침대에 반드시 누워 숨져있는 것을

이틀 후에서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출근 하다시피 하는 공항 라운지의 커피숍에서 그의 모습이

이틀째 보이지 않자

한 웨이터가 왕족의 친척에게 알려주어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터키 기자들이 달려가보니 목욕탕에 빨래를 담가놓은 채로......
오스만 제국의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마지막 왕자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렘은 아랍어:harm 은 이슬람 사회의 부인들이 거처하는 방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일반 남자의 출입이 금지된곳이다

이 명칭은 "금지된"신성한" 을 뜻하는 아랍어 하림harm이 터키풍인

하렘으로 변용되어 非이슬람 국가에 널리 알려지게 된것이다

 

 

 그림은 신고전주의 화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1780-1867)

의 작품이다.......오달리스크는 술탄의 여인들을 표현하는 말이다

 

 

 

오달리스크 1814, 갠버스에 유채 91×162cm루브르미술관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