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당신은 나한데 준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는 연속극에 꽃다발 선물을 주고 받는 장면을 시청하다가 내게 들리도록 큰소리로 말했다.
"이제것 언제 선물 이라는것 줘본적있나 생각좀 해봐요"
"선물 음--------------그건 왜 갑자기 왜??????"
"갑자기 그런게 분해져서"
"왜-- 옛날 덕수궁에서 인상파 르노아르 展 할대 내가 장미꽃을 주었잖어"
"기억에 없어 잘생각해봐요 지금 실수하고 있는지"
"정말 이러기야 분명 검정원피스 입었었는데 당신에게 르노아르 설명하려고
백과사전을 보고 갔는데""
"맞아요 그때나 지금이나 그사기성에 내가 그냥이러고 산다니까"
"ㅎㅎ 장미꽃은 이미 시들었지만 이리와봐 여기 모니터에 르노아르가 있어"
"아!!! 그건 역시 당신 취양이야 난 밀레의 만종이 좋아 둘이 합심해서 일하고석양이 질때 범사에 감사하는 부부그림 그그림좀 보여줘요"
그것 보다는 우리 삼청공원에서 첫키스 어땠어?"
"치 그때도 마찬 가지야괭장히 황홀할꺼라고 하더니 별 감흥이 없었는데"
"왜 지난일을 속이려 해 그때 생각해서 트럼트의 첫키스를 보여줄께"
"나 지금은 마음이 몹시 어지럽네 갑자기 뭉크가 생각 나니까""뭉크는 병약하고 2번씩 실연의 아픔으로 자살 을 시도 할정도 였고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 하여 거부가 됐다지만 그번뇌가 무엇인지 요즘 알것 같은게 왜 일까"
"이제 그만 해 오늘도 재미없어" "그럴까 피서도 못가는데 우리 하이티고겡의 언제 결혼할까나 보고"
슈베르트 음악들어 볼까 여름날 듣는 송어 그리고 영원불멸의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아베마리아" 우리 신혼때 자주 들었던 음악시 슈베르트 "좋지요 어느곡부터?" "그야 물론 아베마리아부터"
슈베르트의 생애는 가난하고 매우 고달팠다 합니다. 음식을 살 때 밤에 떨이로 파는 음식 (소금을 뿌려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을 사서 먹을 정도로 가난했다고 전해집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오래된 인스턴트 떨이만 밥으로 먹은 셈이지요.
슈베르트는 어린 시절 탁월한 미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1살때(1808년) 스타드콘빅트 (궁정 신학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고 아름다운 목소리 덕분에
빈 궁정예배당의 아동 합창단에 뽑혔습니다. 슈베르트는 그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했는데 특히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음악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학창시절에 궁정 오르간 연주자인 루치카와 궁정 악장 안토니오 살리에리로부터 음악 이론을 공부했고,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제1 바이올린 주자(콘서트 마스터)를 담당하기도 했으며 탁월한 미성으로 독창회에 나가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지만 13세(1810년)에 변성기가 도래하여 특유의 미성은 사라졌고 이에 따라 합창단에 머무를 수가 없어서 결국 학교를 나와야 했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 법은 징병제였기 때문에 일정 연령이 된 남성은 군대를 가야 했습니다. 당시 슈베르트의 입장에서 군대를 안 가는 유일한 방법은 학교 선생이 되는 것뿐이었습니다. 음악쪽으로 진로를 삼고 싶었던 슈베르트는 학교 선생이라는 직업이 내키지 않았으나 군대를 가고 싶지 않었던 슈베르트는 결국 1814년 17세때부터 아버지의 초등학교에서 조교사로 일하면서 저학년의 수업을 담당했습니다.
이 해에 슈베르트 최초로 발표된 큰 작품인 F장조의 장례미사곡을 작곡했는데
이때 독창을 맡았던 한살 아래의 테레제 그로브(Therese Grob)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테레제 부모의 반대로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다수의 가곡들을 작곡해 나가기 시작했는데 괴테의 시를 기반으로 한 유명한 가곡 '실을 잣는 그레트헨', '마왕 등이 작곡되었습니다. 특히 마왕을 작곡할 때 집중력이 아주 대단했는데, 친구들이 와서 슈베르트에게 인사할 때 그들이 자기 바로 옆에 서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고 합니다.
갑자기 필을 받아 악보에 작곡을 하고 이 선율을 본 친구들이 아주 좋다고 외친 후에야 슈베르트는 그들을 알아보았다고합니다. 이곡의 초연 당시 지인 연주자는 진짜 마왕을 소환한 것 같아서 소름이 끼쳤다고합니다.
위키백과에서
작곡가들이 살았던시대가 다르고 세상이 달라져도 슬픈선율의 아베마리아든
드라마틱한 아베마리아든 신을 향한 인간의 마음은 늘 같은 곁이었다는 것을
아베마리아는 작품을 통해 엿볼수 있을것입니다 아무리 천재적 작곡능력을
가졌더라도 신을 향한 마음이 없었다면 이렇게 아름답고 경건한 음악을 만들수없었을 것입니다 (음반해설지에서)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
천사가 마리아에게 찾아와 하는 인사에서 유래 어머니께 간절하게 바치는 기도와 애잔한 선율 병마에 시달리며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에 작곡 ‘아베 마리아’라는 말이 들어있는 노래는 수없이 많다. 가톨릭 성가 뿐 아니라 뮤지컬이나 유행가요의 노랫말에도 종종 쓰인다.
‘미녀는 괴로워’라는 영화의 주인공이 무대에서 절절하게 외쳐 부르던 ‘아베 마리아’도 한때 히트곡이 되었고, 라트비아의 소프라노 이네사 갈란테가 부른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베 마리아’가 가사의 전부인데도 여러 해 동안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어째서 ‘아베 마리아’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나 신앙이 없는 사람 모두를 위로하는 온 인류의 노래가 되었을까? 처녀인 채로 구세주를 잉태하게 된 당혹감,
자신의 몸으로 낳은 외아들의 참혹한 십자가 고통을 지켜봐야 했던 괴로움.
그런 특별한 인간적 고뇌를 짊어진 어머니였기에, 누구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막연히 성모 마리아께 의지하고 싶어하는 모양이다.
1475년경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성모 명보 L’annunciazione’를 보면 천사는 오른손을 세운 채 단호한 표정으로 처녀를 응시하고 있고, 왼손을 들어올린 처녀는 놀랍고 곤혹스런 심경을 감추지 못한다. 이때 천사는 입을 열어 “아베 마리아!”라고 처녀에게 인사를 건넨다.
라틴어의 ‘아베(ave)’는 ‘안녕’이라는 뜻의 인사말이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루카 1, 28). 가브리엘 천사가 이렇게 말했을 때 “마리아는 몹시 당황하며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고 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다. 다 빈치는 나중에 ‘성모영보’를 다시 한 번 그렸다.
마리아가 천사 앞에서 양손을 가슴에 모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림이다.
충격의 순간이 지나간 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지금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하는 장면으로 보인다.
루카 복음을 계속 읽어보면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갔을 때 임신 여섯달째였던 엘리사벳이 성령을 받아 외치는 대목이 나온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성모영보(L’annunciazione)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전갈과 엘리사벳의이 인사를 합쳐놓은 것이 오늘날 우리가 기도하는 ‘성모송’의 토대다.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찬미하고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빌어 주실 것을 간청하는 두 가지 주제의 이 성모송은 원래 6세기경에 만들어졌으나 1568년 교황 비오 5세가 이를 ‘성무일도’에 수록하면서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성모송은 수많은 작곡가들에 의해 ‘아베 마리아’라는 노래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6세기 작곡가인 아르카델트나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도 유명하지만 특히 19세기 낭만주의 음악가들은 앞다투어 ‘아베 마리아’를 작곡했다.
리스트, 슈베르트, 구노, 브루크너, 생상스 등이 그 대표적인 작곡가들이다.
구노는 원래 자신의 ‘아베 마리아’를 기악곡으로 작곡해 ‘바흐의 평균율곡집
제1 프렐류드에 관한 명상’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는데, 후에 여기에 라틴어로 된 성모송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Ave Maria, gratia plena…)”이 가사로 붙어 노래로 불리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는 오늘날 구노의 ‘아베 마리아’와 같은 라틴어
성모송 가사로 불리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1825년에 슈베르트가 이 곡을 작곡했을 때 가사로 택한 것은 성모송이 아닌, 스 코틀랜드 작가 월터 스코트의 1810년작 장편 서사시 ‘호수의 아가씨(The Lady of the Lake)’에 나오는 ‘엘렌의 세 번째 노래’를 독일어로 번역한 텍스트였다. 3절로 된 시의 1절은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아베 마리아! 자애로우신 성처녀여! 처녀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당신은 이 험한 땅에서 바치는 기도를 들으시고 절망의 한복판에서 저희를 구해 주실 수 있겠지요. 쫓겨나고 버려지고 모욕당한 저희들이지만 두려움 없이 잠잘 수 있도록 당신께서 지켜 주소서. 성처녀이신 마리아여, 처녀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어머니시여, 당신께 간절히 애원하는 자녀의 기도를 들으소서! 아베 마리아!” ‘아이반호’의 작가로 유명한 월터 스코트의 이 작품에서는, 호수의 작은 섬에 은거 중인 스코틀랜드 공작의 딸 엘렌이 아버지와 연인의 목숨을 살리려 성모께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다. 구노의 ‘아베 마리아’가 성모에 대한 찬미의 가사와 정제된 선율로 우리의 마음을 맑게 승화시켜 준다면,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간절한 기도와 애잔한 선율로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 노래는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어느 때보다도 가난과 병마에 처절하게 시달리던 스물여덟 살 때 작곡한 것으로, 그 우울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피어난 희망의 선율이 더욱 가슴을 저리게 한다. 음악평론가 이용숙(안젤라)씨 슈베르트가 작곡한 당시에도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준 ‘아베 마리아’는 슈베르트 자신도 즐겨 연주한 곡으로 전해진다. 특히 이 아베 마리아는 구노와 카치니 아베 마리아와 비교했을 때 가장 노래다운 멜로디를 갖고 있으며, 다양한 악기로 편곡되어 연주되는 것이 특징이다.
음악사 안에서 ‘아베 마리아’라는 곡 만큼 작곡가와 더불어 연주가가 많은 곡도 드물다. 현대에도 여러 작곡가들의 아베 마리아가 연주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슈베르트의 곡은 유명 소프라노 등이 대형무대에서 한번쯤은 꼭 선보이거나 음반에 싣는 곡으로 통한다. 천상의 목소리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세계적 소프라노 조수미씨는 지난 2006년 4월 4일, 프랑스 파리 샤틀레
극장에서 앙코르곡으로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를 불렀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조씨 아버지의 장례식날과 겹쳤지만 일정 변경은 불가능했다. 조씨는 “서울에서는 아버지의 장례식이 열리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 앞에서 노래를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잘 모르겠네요. 아버지도 제 노래를 잘 듣고 계시리라 믿습니다”라고 말하며 간절한 호소의 느낌 가득히 아베 마리아를 불러 청중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이용숙 칼럼니스트는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 감상을 위해 보이소프라노 다니엘 페레의 음반(튜너, 1995)을 우선 추천한다. 알폰스 폰 아르부르크가 지휘하고 취리히 소년합창단 등이 협연한 음반이다. 또 헬무트 프로쉬아우어 지휘,
다비드 코르디에의 독창, 퀼른 방송교향악단과 빈소년 합창단의 연주로 출시된 카프리치오 음반도 음색이 뛰어난 편이다.
이밖에도 성바오로딸 미디어가 출시한 ‘아베 마리아 트리니타스 합창단’ 음반은 슈베르트를 비롯해 여러 작곡가들의 아베 마리아를 한데 담고 있다. 또 ‘아베 마리아’(2006) 개정판을 통해서는 일반적으로 독창곡이나 합창곡으로 듣던 유명 아베마리아 11곡을 기악곡으로 감상할 수 있다.
사진설명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성모영보(L’annunciazione)', 1472~1475, 98×217cm,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원문출처 평화의모후선교회
친구 슈파운 없이는 슈베르트도 없었다? 슈베르트는 학창 생활 내내 공책이며
휴지 할 것 없이 종이란 종이는 모조리 악보로 사용하며 창작 활동을 했다. 슈베르트 자신은 그런 순간을 행복해했지만, 이런 모습이 고지식한 선생님의 눈에는 달갑게 보이지 않았다. “한 번만 더 작곡하거나 오선지 운운하면 이제 용돈은 없는 줄 알아라!” 드디어 아버지는 슈베르트에게 작곡 금지령을 내렸다.
그럼에도 슈베르트는 용돈 쓰는 즐거움보다 돈줄 끊어지는 아픔을 택했다.
하지만 막상 용돈이 없다 보니 어려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그때그때 떠오르는 악상들을 정리할 오선지를 구할 수 없어 애를 태웠다.
“친구야, 걱정하지 마. 내가 도와줄게.” 그때 친구 슈파운이 그를 위로했다.
슈파운은 자신 또한 넉넉지 못한 형편이면서도 주머니를 탈탈 털어 슈베르트에게 오 선지를 기꺼이 사주었다. 슈베르트의 재능을 믿고 있었기에 격려도 잊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가까스로 교직 과정을 이수한 슈베르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는 초등학교에서 보조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그 당시 열일곱이었던 슈베르트는 이미 <C장조의 교향곡>을 완성해놓았다.
그는 수업 중에 학생들이 무슨 짓을 하든 상관하지 않고 작곡에만 열중했다.
슈파운은 학교에 얽매여 전전긍긍하는 슈베르트를 보며 안타까워하던 중에
휴가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뻐했다. 슈파운은 슈베르트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가족으로부터 슈베르트를 떼어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슈베르트도 같은 생각이었다. 슈파운은 돈 많은 친구 쇼벨의 집으로 슈베르트를 데리고 가서 작곡에만 전념하게 했다.
슈파운은 ‘슈베르티아데’라는 후원회를 만들어 슈베르트를 후원하는 데 앞장섰다. 슈베르티아데는 슈파운을 비롯한 동창생들과 시인, 가수, 화가, 문인 등에 이르기까지 슈베르트를 사랑하는 지식인과 예술인의 모임으로, 회원들은 가볍게 술을 마시며 음악과 토론을 벌였다. 슈베르트는 거의 매일 밤 슈베르티아데 모임에서 자기 작품을 연주했고 신작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슈베르트가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에 장티푸스로 사망하기까지 무려 600여 곡에 이르는 많은 가곡을 썼다. 그가 보여준 음악에 대한 열정도 대단했지만 이처럼 음악가로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데에는 친구 슈파운의 도움이 무엇보다 컸다.
원문출처 채널예스
슈베르트의 명언
벗이 애꾸눈이라면 나는 벗을 옆얼굴로 바라본다.
진정한 친구를 만든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리고 아내를 친구로 만든다는 것은 더 큰 행복이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친구는 밖에만 있는게 아니지요
아베마리아 & 그레고리 성가 (제주도의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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