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반차도(김홍도)

이모르 2020. 12. 24. 19:41

정조대왕 반차도

 

 

사진 출처 (부산 박물관 소장)

 

 

전준천 제명첩 1760년(영조36년)에 실시된

청계천 준천공역(준설)을 성공적으로

완공 한 것을 기념하여 그린 일종의 기록화첩

공사는 이해

2월18일부터4월15일까지 두달간 시행한

이공사는 연인원20만명이 동원되고

3만5천냥과 쌀2.300석이라는

그당시 어마어마한 대역사로 1773년에도 다시

이런 공사를 했다 한다

 

 

 

친우 3인 부부가 청계천 반차도 타일벽화를 보기위해

청계천나들이에 나섰다

하늘도 맑고 잘 정비된 청계천 시작점으로 진입한다.

인공폭포가 쏟아지고 시원하게 물줄기가 뻗어 나간다.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며 정조대왕의 반차도 앞에서다.

 

궁중화가 김홍도가 그린 정조대왕 화성행행반차도

 

정조대왕 화성행행반차도는 조선 22대 국왕 정조가

그의 아버지 장조(사도세자)가 회갑을 맞은해 잠들어 있는

화성 현륭원을 참배하고 와서 기록한 기록화 귀장각

능행행차도를 현대적으로

청계천에 재현한 벽화로 가로 세로 30cm

세락믹 타일 5120장을 이어 붙힌 길이 192m의 세계 최대의

도자벽화이다 

원본은 원본대로 문화재 가치가 있고 청계천에 재현된 벽화는

역사적인 행차를 현대적인 기법으로 재탄생 시킨 작품이다  

 

 

정조대왕 어진

 

 

김홍도의 자화상

 

 

 

 

우리가 어릴때부터 들어온 비운의 왕자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

갇혀 죽었다는 말로서 쌀뒤주만 보면 사도세자의 생각이 났었다

 

차라리 귀향을 보낼 일이지!!! 친자를 그런식으로 사살했다는

영조는 사실 어머니가 무수리 출신 야사에 전언을 보면

노론의 힘으로 장희빈의

아들 경종을 독살하고 왕위에 올랐다 했는데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는 소론이었고 사도세자도 소론을 따랐기 때문에

사단이 난 것으로 된다.

 

역사를 배우게 되면서 듣게 되는게 영조의

탕평책 당쟁을 혁파하고 군역법을 실시 하게 된다.

 

영조에게 전수받은 탕평책은 정조의 정치이념이었고

효는 사도세자의

애절한 사연때문이었다

 

 

구파발에 있는 영조대왕 공덕비

 

 

구파발이 개발되기전에 화원옆으로 비문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내용은 영조가 어린 세손 이산을 데리고 서오능을 참배하고

환궁할 때 비석이 있는자리에서 쉬어갔다고 한다.

 

마침 고울수령이 소도둑을 잡아왔다.사연인즉 병든노모를 위한

효행이 발단인지라 어명으로 방면하라 이른다.

“정조는 효를 깨닫게 된다... 그런식으로 영조는 정조를 직접 대화법과 현실

참여교육을 통해 정조의 자질을 높혀 주었다

 

 

52년간 왕위에 있던 영조가 1776년 3월 5일 죽자 소렴과 대렴이 끝난 5일

후인 3월 10일 조선 22대 왕 정조가 왕위에 오른다. 25세였다.

 

왕위에 오르자 마자 정조가 내린 첫 교지는 바로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28세로 숨을 거둔 아버지 사도세자는 정치의 희생양이었다.

 

불과 열 살 나이에 노론이 중심으로 일으킨 임인사화를 비판할 정도로 총명했던

사도세자는 진보주의자였으며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리하여 한많은 한중록의 저자 어머니 혜빈홍씨를 모시고 화성의 아버지묘소

화성에 있는 현능원에 행차하게 되는데 규장각에 있는 반차도는 궁중화가 였던

김홍도가 그린일종의 작업계획서로서 정조에게 보고한 내용들인데 이런

반차도 때문에 1700명이나 되는 인원이 한강을 도강하게 되고 질서 정연하게

참배할수 있게 된다

 

여기에는 물론 실학을 존중한 정조의 배려로 정약용 같은 인물들의

활약이 있었지만 규장각 도서를 보지못한 나는 청계천 변의 타일

조각화로 표현한 반차도를 흥미있게 올려볼까 한다.

 

 

 

 

 

 

 

 

 

인마와 갑마를 앞세우고 경기감사가 뒤따르고 있다.

 

 

 

 

 

 

 

 

 

 

의정 채재공이 임시직 총리대신 신분으로 앞장서 가고 있다

 

 

 

 

 

 

 

 

 

 

 

 

 

 

 

 

 

 

 

 

 

 

 

 

 

 

 

 

 

 

 

행차의 선두, 경기도 화성이므로 경기감사 서유방이 행렬의

선두에서 위풍당당하게 행렬을 인도하고 있다. <> 정조가

타기로 되어 있는 어가가 등장, 가마는 말이 끌고 간다. 그러나

실제 정조는 이 어가에 타지 않았다.

 

 

 

 

 

 

용기

 

 

 

 

 

 

 

 

 

 

 

 

수라가자. 행차도중 임금이 먹을 음식을 실은 수레다.

 

 

 

 

 

 

 

 

 

 

 

 

 

 

내시들도 당당히 행진했다

 

 

 

 

 

 

 

 

자궁가교.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홍씨가 탄 가마.

 

 

 

 

이 행차의 주인공 혜경궁이 탄 가마 등장, 협련군과 근장군사 등의 삼엄한

 

 

경호를 받으면서 화려하게 등장한다. <우> 정조가 탄 좌마가 30명의

 

 

협마무예청과 30명의 협마순노 등의 호위 아래 혜경궁 가마 뒤를 바짝 따르고 있다.

 

 

이번 행차는 어머니를 모시고 가기 때문에 일부러 가마를 타지 않았다.

 

 

말 위에 왕이 보이지 않는 것은 왕의 실제 형상을 그리지 않는 관례 때문이다.

 

 

 

 

 

 

좌마. 정조대왕이 탄 말이다. 하지만 얼굴이 없다.

 

 

 

 

 

 

군주쌍교. 정조의 두 누이동생 청연군주와 청선군주가 탄 가마.

 

 

 

 

 

 

 

 

 

 

 

 

 

 

 

 

 

 

 

 

 

 

 

 

 

 

 

 

 

 

 

 

 

 

 

 

 

 

 

 

 

 

 

 

 

 

 

 

 

 

 

 

 

 

 

 

 

 

다음글은 디자인 서울의 글을 빌려온 것입니다

 

 

 

 

정조대왕 원행 행차도는 섬세한 표현을통해

 

일련의 행사진행 계획을 그려 눈으로 보는것 만으로도

 

행사가 가능하도록 묘사한 살아있는 계획도이다.

 

 

 

 

 

 

 

의궤는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한 주요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보고서 형식의 책이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을묘년 1795년에 정조가 생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능원에 행차한 모습을 정리한 의궤로 이행차는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한것이다

 

 

 

 

 

 

 

의궤그림 가운데 반차도란 그림이있다 반차도란 행사의 진행을 위한 일종의

 

계획도이다 정조대왕 원행 반차도는 이의궤의 판각화로 삽입되어있는 기록화이다

 

 

 

목판인쇄본에는 채색하지 않았으나 실제의 행렬모습을 측면에서 재연하여

 

각인물의 표정과동작등에 변화를 줄수 있었다.이와같은 섬세한 표현은 자칫

 

형식적이고 딱딱해지기 쉬운 기록화에 자유로운 기운을 불어넣고있다.

 

 

 

 

 

 

정조대왕 원행 반차도가 흑백으로된 목판본이라면 화성원행 반차도는 한지에 천연색

 

물감으로 채색하여그린 1폭짜리 두루마리 그림이다 (규장각소장) 두그림 모두

 

행사의 순서를 그린 반차도이기 때문에 그성이나 배치에 큰차이는 없다

 

 

 

하지만 이두루마리의 그림은 실제원행이전에 제작된 그림으로 도상을 통해

 

미리 행렬을 연습하기위한 일종의 그림교본이다

 

 

 

한강 도강도

 

 

 

따라서 그림 표현방법에도 배열의 순성와 위치를 정확하게 고지하기위하여

 

뒤에서본 시점 (부분적으로 측면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세로방향에 맞춰저있다)

 

으로 각요소를 순서대로 나열하여 전체행렬을 보여주고 있다.

 

 

 

 

한강을 건너는데는 배를 타고 건너는것이 오랜 관행이었지만 때에 따라서는

 

배다리를 놓는경우가 있었다 화성으로 행차할 때 가장어려운 일은 한강을 건너는

 

일이었다 한강을 최소의경비로 안전하게 건너기위해서는 배다리를 놓는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처음에는 20일정도 예상했으나 불과11일만에 배다리가 완성되었다

 

정조가 지시한대로 기술을 크게 보완하고 치밀하게 준비한 덕분이었다.

 

한강에 단기간내에 최소의물자로 배다리가 건설된것은 이때가 처음으로 이는

 

조선시대 다리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자 우리과학기술의 한페지를

 

장식하는 사건이었다.

 

 

오방색 깃발을 나부끼는 배다리위로 1700명의행렬이 말을 타고 지나가는

 

모습을 상상하면 장관이 아닐수없다.

 

 

 

영조 대왕 혼레식도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홍씨 의 휴식 휘장이 처져있다

 

혜경궁홍씨 에게 백성들이 경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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